분류 전체보기16 엄마의 작은 책상 엄마의 사업장 한켠에는 작은 책상이 놓여 있다. 아주 조그맣고 볼품없는 책상이지만, 그 위엔 엄마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다. 그날 아침에도 엄마의 책상 왼편에는 활자가 큼지막한 성경책이 펼쳐져 있고, 오른편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난 손때 묻은 노트북이 켜져 있었다. 아마 사고가 나던 날 아침에도, 엄마는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성경을 타이핑하고 계셨던 것 같다. 전에는 한 자 한 자 정성껏 손글씨로 성경을 필사하시더니, 이제는 컴퓨터를 배우셔서 자판 위를 분주히 오가는 손끝의 기쁨에 푹 빠지신 모습이었다.얼마전, 컴퓨터를 다룰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하셨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올해로 87세가 되신 엄마는 시간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셨다. 나이가 무색할 만큼 늘 뭔가를 배우고, 기록하고, 나누는 일을.. 2025. 4. 7. 보랏빛 히야신스 갑작스런 엄마의 장례를 마치고 지구반대편 집으로 돌아왔다. 무거운 마음으로 집앞 마당에 들어서는데 어디선가 진한 꽃내음이 풍겨온다. 두 해 전에 화단 한 켠에 심었던 보라빛 히야신스가 올해도 어김없이 활짝 피어 있었다. 다른때 같으면 예쁜 꽃이 피었음을 기뻐하고 꽃향기를 맡으며 호들갑을 떨었을텐데.. 마음이 저려온다. 히야신스도, 마당의 다른 나무와 꽃들도 매년 그 자리를 지키는데 이제는 더 이상 엄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너뜨린다. 눈물이 다시 흐른다…화장장에서 엄마의 몸이 순식간에 한 줌의 재로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절절히 느꼈다. 이렇게 쉽게 사라질 존재들인데 우리는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었을까.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문득, .. 2025. 4. 4. 권사님, 권사님, 우리 권사님… 3월 8일 아침 8시, 엄마는 긴 인생길을 마무리하고 조용히 주님의 품으로 가셨다. 그 순간이 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막상 그 날이 닥치자 가슴 한쪽이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해도, 엄마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엄마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많은 분들이 먼 길을 달려와 주셨다. 엄마가 섬기던 교회의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함께하며 조문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다. 엄마와 오랜 시간 신앙을 함께 나눈 분들이었다. 모두의 표정에는 슬픔과 애도가 서려 있었지만, 그 안에는 엄마를 향한 깊은 사랑과 존경도 담겨 있었다.예배를 준비하는 손길들이 분주했다. 유가족과 조문객들에게 예배 순서지가 나누어졌고, 순서지 가운데 적혀있는 설교 제목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 2025. 4. 4. 쌍화탕 권사님 3월 5일, 새벽 공기가 아직 차가운 시간이었다. 새벽예배가 시작되기 전, 나는 엄마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엄마가 다니시던 교회의 목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자 작은 종소리가 맑게 울렸다. 목사님은 문소리를 듣고 자연스럽게 얼굴에 미소를 띠셨다.그러나 낯선 나를 보고 잠시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으셨다.매일 새벽 목양실을 들리시는 엄마이신줄 알았다고 하신다. “목사님, 저는 한 권사님의 큰딸입니다.”내가 그렇게 말하며 엄마의 교통사고 소식을 전하자, 목사님은 순간 아무 말도 잇지 못하셨다. 불과 이틀 전, 엄마와 함께 주일예배를 드렸고, 삼일절 특별예배에서도 얼굴을 마주했는데… 갑작스러운 사고 소식에 목사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으셨다. 그리고 이내 눈물을 쏟으며 통곡하셨다.새벽.. 2025. 4. 3. 새벽 두 시의 외출 엄마의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새벽 두 시마다 어김없이 잠에서 깬다. 처음에는 시차 때문인가 싶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전했다. 고요한 밤이면 엄마 생각이 나서 며칠을 눈물로 지새웠다. 마음이 어지러웠고,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뒤엉켜 있었다. 결국 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엄마를 기억하기 위해, 엄마의 삶을 되새기기 위해.엄마는 팬데믹이 시작된 후 매일 새벽 두 시가 되면 집을 나섰다. 노인은 충분히 잠을 자야 한다며 만류하는 우리에게 엄마는 고집을 부리셨다. “ 조용한 새벽에 걸으면 몸도 개운하고, 길가에 나뒹구는 폐지를 줍는 재미도 있다”며 웃으셨다. 생계 때문이 아니라, 즐겁게 하는 일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어느 날은 택시기사가 새벽에 폐지를 줍는 엄마를 보고 불쌍한 노인인 .. 2025. 4. 2. 빚진자의 마지막 찬양 엄마의 천국환송을 위해 애써주신 임목사님이 보내주신 엄마의 회고 영상 속에는 성도들 앞에서 찬양하시던 엄마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2024년 성탄절 예배 때, 여든여섯의 연세에도 엄마는 강단 앞으로 나와 찬송을 부르셨다. 다소 갈라지고 힘이 부치는 목소리였지만, 여전히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음성이었다. “올 한 해 하나님께 너무 많은 빚을 졌다며 그 빚을 갚기 위해 찬양을 드린다고“ 인삿말을 하시고는 씩씩하게 4절까지 온 힘을 다해 부르셨다.엄마는 하나님께 무슨 빚을 지셨을까? 얼마나 많은 빚을 졌다고 생각하셨기에 그렇게 마지막까지 힘을 다해 찬양하셨을까? 은혜에 대한 감사를 그렇게 빚으로 표현하신 걸까? 엄마와 통화할 때면 늘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던 순간들을 말씀하시곤 했다. 삶의 어려운 순간에도 하나.. 2025. 4. 2. 이전 1 2 3 다음